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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웅치면, 다시 보는 보성 이야기

꽃문어맨 2023. 8. 11. 12:22

웅치면, 다시 보는 보성 이야기

원래 견주에 속해있던 본면(本面)은 1545년(조선인종원년(朝鮮仁宗元年)) 장흥군을 신설하면서 장흥에 속하게 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회령·율포 등과 함께 다시 보성군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곰재”라는 우리말을 한자음인 웅치(熊峙)로 표기하여 면의 명칭으로 삼았다. 곰재의 유래는 장흥과 접경해 있는 제암산 산영(山嶺)에 곰바위가 있어서 이 고개를 곰재라 부르게 되었다. 소재지인 중산리(中山里)를 포함하여 6 개리로 편성되어 있다.

 

웅치면의 웅치 올벼쌀

강산(江山) : 웅치면 강산 1리

강산리는 한때 장흥군 웅치면의 지역으로 기(箕 : 겨) 재밑이 되므로 강산(糠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암리, 채석리, 중선리, 강산리 등 4개 마을을 병합하여 웅치면 강산리라 하였다. 강산마을은 1489년경 광산김(光山金)씨가 입 향하여 터를 잡고 살던 중 1503년 경주최(慶州崔)씨와 진주정(晋州鄭) 시가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지금은 대부분 진주정 씨가 집성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지명은 마을뒷산의 생김새가 키(箕) 모양으로 생겨서 키산이라 불렀고 키질을 하면 겨가 쌓인다 해서 강산(糠山)이라 불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당시 마을 앞에 냇물이 흐른다고 해서 강(糠)을 강(江)으로 한 글자만 바꿔 강산(江山)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구암(九岩) : 웅치면 강산 2리

구암 마을은 1649년경 청주 한(淸州韓)씨가 입 향하여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그 후 여러 성씨들이 살고 있다. 마을의 지명은 마을 앞들의 이름이 구와등(龜臥登)인데 이곳에 큰 바위가 있어 구암(龜岩)이라 부르다가 1755년경, 풍수지리설에 능한 마을 노인에 의해 마을형국이 비둘기 같이 생겼다 해서 한자의 ‘구’를 ‘鳩’로 바꾸었는데 1945년경 또다시 마을 가운데 큰 바위가 9개가 있다 해서 ‘鳩’를 ‘九’로 바꾸어 구암이라 부르고 있어 같은 지명이 3번이나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장변(場邊) : 웅치면 강산 2리

장변 마을은 광복 후인 1946년경 이곳에 5일 시장이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평산신(平山申)씨를 비롯한 2세대가 맨 처음 정주(定住)했다 한다. 마을의 지명은 면소재지에서 약 2km 떨어진 북쪽인데 옥암과 대야의 중간 지점을 선택하여 시장(市長) 자리를 잡았다 한다. 그 후 1967년경까지는 반나절 장으로 유지하다가 1968년부터 교통의 발달로 생활권이 보성 5일 시장으로 바뀌어 짐에 따라 폐쇄되고 경제권의 이동과 함께 한 사람 두 사람 떠나버려 작은 마을이 되고 말았으며 지금은 곰재(龍峙) 장터의 향수만 쓸쓸히 남아있다. 시장가(場邊)에 위치한 것을 한자음 그대로 빌어 쓴 것이다.

 

중선(重船) : 웅치면 강산 4

중선마을은 1530년경 연월엄 씨와 평산신(平山申)씨 전주가(全州李)씨가 입 향하여 터를 잡고 살았으나 그 후 김해김(金海金)씨와 하동정(河東鄭)씨가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지명은 1530년경 한 도사가 지나면서 마을 주산의 흐름을 보고 과연 힘 있는 큰 배의 형국이라 마을 앞들에 짐대를 세워달면 자손만대에 부(富)를 누린다 하므로 그때부터 정월 대보름 날이면 온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해서 배의 돛대대신 짐대를 만들어 마을 중상에 세우고 풍년제를 지냈다 한다. 중선(重船)이란 ‘크고 무거운 배’라는 뜻으로 마을의 형국이 풍수지리설에 이와 같다 하여 한자를 빌어 표기했다.

 

담안(墻內) : 웅치면 대산 1리

담안마을은 고려말엽 범(凡)씨와 임(林)씨가 입 향하여 터를 잡고 살다 떠나고 조선초엽에 수원백(水原白)씨와 하동정(河洞鄭)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여 지금은 수원백씨와 하동정 씨, 광산김 씨 등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옛 명칭은 선형동(船形洞)이라 하였으나 범(凡)씨와 임(林)씨가 살던 시절에 마을의 형태가 배형국과 흡사하므로 배(船)를 고정시키기 위해 마을 주위에 돌담을 쌓았다 하며 그래서 들독(業石) 거리는 배의 닻에 해당된다고 한다. 임(林)씨가 살던 밖의 들과 통하는 문을 임문(林門), 왼쪽 청룡동 밖의 들과 통하는 문은 남문(南門), 계(繫) 밖의 들과 통하는 후문(後門)을 쌓고 담안(墻內)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담안이라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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