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순천시, 다시 보는 순천 이야기
동쪽은 광양시, 서쪽은 화순군·보성군, 남쪽은 순천만의 여수시·보성군, 북쪽은 구례군·곡성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7°10′∼127°35′, 북위 34°49′∼35°11′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은 910.43㎢이고, 인구는 27만 8765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10개 면, 13개 행정동(33개 법정동), 414개 행정리(163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전라남도 순천시 장천동에 있다.
자연환경
소백산맥의 자락에 자리 잡고 있어 크고 작은 산지가 발달해 있다. 전체적으로 북쪽과 서쪽이 높고 기복이 심하며 남동쪽이 낮다. 시의 대부분은 산악이 중첩해 있다.
중앙에 조계산(曹溪山, 884m)이 솟아 있고, 동쪽에 수리봉(550m)·국사봉(526m)·갈미봉(渴味峰, 639m)·비봉산(飛鳳山, 550m)이 있으며, 남쪽에 고동산(鼓動山, 709m)·금전산(金錢山, 668m)·제석산(帝釋山, 563m) 등이 있다. 서쪽으로는 망일봉(望日峰, 652m)·모후산(母后山, 919m)이 있고, 북쪽에는 희아산(戱娥山, 764m)·봉두산(鳳頭山, 753m)이 있다.
주암면의 모후산은 시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무등산(無等山)을 제외하고는 산세가 가장 큰 산이다. 산을 중심으로 능선이 +자 형으로 뻗어 있어 주암면·송광면과 화순군의 동복면·남면의 경계가 이 능선을 따라 정해지고 골짜기 또한 4개 면에 분리, 소재한다.
높은 산이 많아 계류(溪流)도 많고 수원도 풍부하다. 보성군 웅치면에서 발원한 보성강이 송광면을 관류해 흐르다가 주암면 대광리에서 주암다목적댐을 만들고, 시의 경계를 벗어나 북동류해 섬진강과 합류한 뒤 남해로 흘러든다. 또 조계산 북동쪽에 있는 고치(鼓峙)와 송치(松峙)를 분수령으로 해 이사천·동천이 남류해 순천만으로 흘러든다.
이사천(伊沙川)은 승주읍 유치산 남사면에서 발원해 산간 지대를 곡류하면서 상사면 봉래천·상사천과 합류하고 동천과 합류해 순천만으로 흘러든다. 순천시를 관류하는 하천으로는 가장 긴 강이며, 시의 남쪽에 발달한 순천평야의 일부인 도사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계족산(鷄足山, 726m)에서 발원해 시의 동부를 관류하는 동천(東川)은 중간에서 석현천·옥천 등과 합류한 뒤 남쪽으로 흘러 순천만으로 흘러들며, 하천 유역에는 비옥한 순천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남서부에 낙안분지(樂安盆地)가 있다.
별량면과 해룡면 해안은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다. 바다가 잔잔하며 포구가 발달했으며, 조수간만의 차는 심하지 않으나 수심이 얕기 때문에 대형 선박의 출입은 어렵다. 도서로는 무인도 2개가 있다.
기후는 국토의 남단에 자리 잡고 있고 해안에 접해 있어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온난한 편이다. 연평균기온은 북부 산악 지대는 12.3℃, 남부 평야 지대는 13.9℃, 1월 평균기온 -0.9∼2℃, 8월 평균기온 24.5℃이며, 연강수량은 1,765㎜이고 서리는 10월 중순부터 내려 4월 중순에 끝난다.
역사
구석기 유적으로는 송광면 신평리·덕산리·우산리 등에서 200여 점의 뗀석기가 발견되었다고 보고되었다. 시의 북방에서도 구석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조그만 뗀석기를 발견했다는 미국인 모어(Mohr. A)의 보고가 있었으나(1965년) 공인받지는 못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유물로는 송광면 대곡리, 황전면 대치리 등지에서 빗살무늬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유물로는 가곡동·용당동·왕지동·조례동 등과 서면·별량면·상사면·송광면·해룡면·주암면·승주읍 등에 고인돌군이 집중 분포되어 있고, 인접지역에서 돌칼·돌창·주거지 유적 등이 발견되고 있어 순천지역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문 활동의 중심지였음을 알게 해 준다.
마한의 여러 소국들 중 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 또는 신분할국(臣濆活國)이 낙안·벌교 지역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사실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백제시대에는 감평군(欿平郡) 또는 사평(沙平), 무평(武平)이라 불렀고 주암면 지역에는 둔 지현(遁支縣), 낙안면 지역에는 분차군(分嵯郡)이 있었다.
757년(경덕왕 16)에 감평군은 승평 군(昇平郡)으로, 둔 지현은 부유현(富有縣)으로, 분차군의 분령군(分嶺郡)으로 개칭되었으며 승평 군은 예하에 부유현과 지금의 여수·돌산 지역까지 영속하였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했을 때 그의 사위 박영규(朴英規)가 이 지역의 성주로 군림했고, 뒷날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의 통일 사업에 크게 협력하였다.
983년(성종 2) 12목 설치 당시 승주목이 되어 외관이 파견되었고, 996년에 연해군절도사(兗海軍節度使)가 되었는데 일명 승화(承化)라고도 하였다. 1036년(정종 2)에 다시 승평 군으로 복구되었으며 1309년(충선왕 1)에 다시 승주목으로 승격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순천부로 강등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순천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이 시기의 순천부는 여수현·돌산현·부유현 등을 속현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한편 낙안지역에는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둠으로써 나주의 속군에서 벗어나 주현으로 독립하였다. 무인정권이 성립되었을 무렵 보조국사 지눌(知訥)은 조계산 수선사(修禪社)를 중심으로 조계종의 결사 운동을 일으켜 불교사상의 개혁을 꾀했으며, 이 수선 결사가 송광사(松廣寺)로 발전하였다.
한편 충렬왕 때 승평부사 최석(崔碩)이 선정을 베푼 뒤 교체되어 떠날 때 군민이 정표로서 바친 8 필의 말을 되돌려 보냄으로써 청백리(淸白吏)의 표징을 나타내는 팔마비(八馬碑)가 건립되어 순천의 중요한 정신적 지표가 되고 있다.
1413년(태종 13)에 순천도호부가 되고 세조 때 편제된 진관체제에 따라 주진으로서 전라도 동남부 지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때 순천의 행정영역은 현재의 순천시 전역과 여수반도 전역의 영역이었다. 그 뒤 효종 때 순천현으로 강등되었다가 얼마 후 도호부로 복구되었으며 1786년(정조 10)에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이듬해 복구되었다.
1597년의 정유재란 때 왜군의 침입으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때 선암사가 소실되었다. 왜군들은 해룡면 신성리 부근에 성을 쌓고 장기 주둔을 꾀했는데, 그 흔적이 남아 오늘날 왜성대(倭城臺) 또는 망해대(望海臺)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광해군 때 부사로 부임한 이수광(李睟光)은 『승평지(昇平志)』를 저술해 이 지방의 문물을 보존해 주었다. 영조 때 엮은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순천은 전주·나주 다음가는 인구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1895년의 지방제도 개혁으로 순천군이 되었으며, 이듬해율촌면 이남의 여수반도와 섬 지역들이 여수군과 돌산군으로 분리, 독립되었다. 1909년 낙안군이 폐지되면서 예하의 7개 면과 곡성군의 일부 지역이 편입되었다. 1911년 소안면과 장평면이 합쳐져 순천면이 되었으며, 1931년에 순천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한편, 1929년에 동초면을 없애고 그 지역을 이웃의 낙안·벌교·별량 지역으로 분속 시켰다.
1919년 3·1 운동 때는 순천시 지역은 박항래(朴恒來)가 연자루에서, 그리고 낙안 지역에서는 안호형(安鎬瀅)·김종주(金鍾胄)등 33명이 벌교시장에서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했으며, 서면 일대에서 박병두(朴炳斗)를 시작으로 해 일어난 소작 쟁의가 벌교 등지를 비롯, 전국 각지로 퍼져 1920년대 소작쟁의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1948년 여수에서 일어난 국군 14 연대의 반란세력이 순천시를 점령함으로써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었다. 1949년에 순천읍과 도사면 일부, 해룡면 일부를 합쳐 순천시로 승격함에 따라 나머지 지역은 승주 군이라 개칭되어 순천시와 승주군으로 개편되었다. 1962년 8월 27일 순천 시내의 동천제방이 붕괴되면서 대홍수가 발생해 200여 명이 사망하는 큰 재해를 입기도 하였다.
1973년 보성군 문덕면 한천리가 송광면에 편입되었고, 1983년에는 주암댐과 상사호 공사가 시작됨에 따라 주암면·송광면·상사면 및 승주읍 지역의 여러 마을들이 수몰되어 많은 주민들이 이주하였다. 1985년 쌍암면이 승주읍으로 개칭, 승격되었고 1987년에는 해룡면 복성리 일부가 광양읍으로 편입되었다.
1995년 시·군 통합으로 순천시와 승주군이 통합되어 순천시가 되었다. 같은 해 8월 10일에는 주암면 풍교리가 문길리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98년 1월 15일에 해룡면의 일부가 조례동에, 생목동 일부가 조곡동에, 조곡동 일부가 생목동에, 풍덕동 일부가 조곡동과 장천동에 각각 편입되었다. 또 1999년 8월 16일에는 해룡면의 일부가 연향동에, 연향동 일부가 해룡면에 편입되었다.
교육 문화
조선시대 교육 기관으로는 순천향교와 낙안향교 등이 있다. 1407년(태종 7) 성(城) 동쪽 7리 지점에 순천향교를 창건했는데 5차례 이건한 후 1801년(순조 1) 금곡동의 위치로 옮겼다.
낙안향교는 창건 연대가 확실치 않으나, 『신 증동국여지승람』에 이미 “군(郡) 북쪽 1리에 향교가 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1658년(효종 9)에 농암등(籠巖嶝)에서 현재의 낙안면 교촌리로 이건 하였다. 1777년(정조 1)에는 향교 곁에 따로 양사재가 건립되었다.
옥천동의 옥천서원은 1564년(명종 19)에 김굉필을 배향하고자 설립한 것으로, 이황이 옥천정사라는 이름을 짓고 현판을 써 주었다. 이어 저전동의 정충사, 금곡동의 청수서원·용강서원, 연향동의 옥계서원, 별량면의 송천서원과 율봉서원, 상사면 흘산리의 이천서원, 조례동의 충렬사, 그 밖에 곡수서원, 겸 천사 등의 설립이 이어지면서 중기 이후 유림 문화의 구심점을 형성하였다. 이 가운데 사액된 곳은 옥천서원을 포함해 정충사·청수서원 세 곳이다.
근대 교육의 발단은 1896년에 공립순천심상소학교를 설립한다는 당시 관보의 기사로부터 추적할 수 있으나 역사적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1906년에는 사립 승명학교(昇明學校)가 개교되었으나 1910년 보조 지정 인가 후 공립 순천보통학교로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1913년에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사립 원성학교를 설립했는데, 종교 교육을 둘러싸고 일제와 마찰이 있어 1916년에 폐교했다가 1921년 매산학교로 복설 했으며 1937년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 광복 후 다시 복교되었다.
그 밖의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17년에 개교한 낙안면 낙안공립보통학교를 시작으로 1920년 황전면에 황전공립보통학교, 1921 년주암면 구산리에 주암공립보통학교, 1922년 별양면에 별양공립보통학교, 1923년 송광면에 송광공립보통학교, 1924년 승주읍에 쌍암공립보통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또 1935년에 공립순천농업학교가 설치되고, 1938년에 순천공립고등보통학교, 1940년에 순천공립고등여학교가 각각 개교하였다. 이어서 광복 후 1952년에는 주암면 창촌리에 주암중학교가 설립되었고, 1971 년주암면 구산리에 주암고등학교가 세워졌다가 지금은 주암종합고등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1개교, 중학교 21개교, 고등학교 16개교, 순천청암대학·순천제일대학·순천대학교가 있다.
문화·복지 시설로는 공공 도서관 3개소, 일반 공연장 1개소, 영화관 6개소, 시민 회관 2개소, 복지 회관 1개소, 청소년 회관 2개소, 문화원 1개소가 있으며, 라디오와 TV 방송국 각 1개소의 언론 기관이 있다. 문화제 행사로는 팔마제와 함께 10월 중순에 낙안읍성에서 남도음식축제가 열린다.
'고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천시, 다시 보는 순천 이야기 (3) (0) | 2023.08.11 |
---|---|
순천시, 다시 보는 순천 이야기 (2) (0) | 2023.08.11 |
웅치면, 다시 보는 보성 이야기 (0) | 2023.08.11 |
회천면, 다시 보는 보성 이야기 (0) | 2023.08.11 |
득량면, 다시 보는 보성 이야기 (0) | 2023.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