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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득량면, 다시 보는 보성 이야기

꽃문어맨 2023. 8. 10. 02:00

득량면, 다시 보는 보성 이야기

신라 경덕왕 때에는 산양군(山陽郡)에 속하였으며 조선조(朝鮮朝)의 1910年까지는 송곡면(松谷面)과 도촌면(道村面)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1917年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송곡, 도촌, 양면을 병합하여 得粮面이라 칭하고 면소재지를 송곡리에 두었으나, 1945年 面의 중앙지인 오봉리(五峰里)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행정구역은 9個里로 편성되어 있다.

 

보성군 득량면의 장미꽃

 

쇠실(深松) : 득량면 삼정 1리

삼정리는 보성군 송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삼송리, 신전리, 국치리, 성재리, 서재리를 병합하여 삼정리라 해서 득량면에 편입되었다. 쇠실 마을은 조선초기에 촌락이 형성되어 조선중기까지는 백 씨, 강 씨 등이 거주하였으나 인조반정시 도원수인 김자점이 효종왕 즉위부터 몰락해 감에 따라 동족인 안동김 씨가 은신키 위해 나주군 금천면(옛 나주 소재지)에서 이주하여 지금까지 안동김 씨가 집성을 이루고 있다.

 

가신(可信) : 득량면 송곡 1리

송곡리는 한때 보성군 송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신리, 기동리, 박곡리, 중흥리를 병합하여 송곡면사무소가 있었으므로 송곡리라 해서 득량면에 편입되었다. 가신마을은 조선초기 1543년경에 제주양(梁)씨가 처음 터를 잡고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마을지명은 마을 뒷산의 국사봉이 좌우로 뻗어내려 마을을 감싸고 있는 형국으로 건설에 의하면 가신동 사람들은 거짓을 모르고 이웃끼리 상부상조를 잘한다고 하여 인근 주민들이 이 마을을 가신동이라 하였다 한다.

 

파청(波靑) : 득량면 예당 1리

예당리는 본래 보성군 송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천리, 진천리, 적연리, 이정리, 파청리, 덕산리, 동곡리, 호동리 일부와 조내면의 동곡리와 신촌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예장산의 이름을 따서 예당리라 해서 득량면에 편입되었다. 파청(波靑) 마을은 약 250년 전경에 김해김(金海金)씨가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지명은 마을 뒷산에 보살들이 절을 건립하였는데 절에 빈대가 많아 타 지역으로 옮기면서 마을이 폐할 것이라 하여 파청이라 하였다고 한다.

 

양월(揚月) : 득량면 예당 2리

양월(揚月) 마을은 여조의 관료 및 선비들의 몰락으로 이곳으로 피신키 위하여 180년경부터 은거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음과 양이 상충되지 않는 안 좌 된 지세가 반월형(半月形)에다 현산(賢山)의 송림(松林) 사이로 일조(日照)와 월광(月光)이 충만하여 덕(德)과 부(富)를 겸비한 인재들이 배출될 것이라는 고승의 유지에 따라 양월(揚月)이라고 하였다 한다. 구전에 의하면 마을 오른쪽산의 백호줄기에 흙이 빨갛게 보이면 큰 화재가 일어난다 하여 항상 나무를 심어 붉은 산이 보이지 않게 푸르게 가꾸고 있으며 동풍이 강하게 불어 산이 울면 대홍수 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호동(湖洞) : 득량면 예당 3리

호동마을은 조선조 초기 동북오 씨가 처음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동쪽으로 조성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남쪽으로 관기마을 서쪽으로 양월마을과 접하였고 북쪽으로는 방장산(方丈山)이 우뚝 솟아 있으며 옛날에는 마을뒷산이 수림으로 울창하여 산짐승이 많이 서식하였는데 특히 여우가 많아 여쉬골으로 불러오다가 약 70년 전 일제강점기에 마을에 물이 귀하고 빈곤하여 마을원로 김기섭 옹께서 우리 마을은 물을 얻어야 한다는 소원으로 마을명을 호동(湖洞)으로 개칭하여 현재까지 불러오고 있다.

 

보흥(寶興) : 득량면 오봉 2리

보흥부락은 득량면 소재지로부터 3.7km 떨어진 동쪽에 위치하고 예당으로부터 1.5km 떨어진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뒤로는 경전선 철도가 통과하고 있으며, 마을 중앙으로는 득량면, 조성면, 고흥군, 대서면 사이에 1,700 정보의 농경지에 이용되고 있는 농업용 수로가 지나고 있으며 1927년 고흥군 대서면과 보성군 득량면 사이의 제방을 막은 후에 형성된 논을 경작하기 위하여 흥업주식회사가 이주민 주택 27동, 가주택 9동을 건립하여 1937년 3월 각처에서 이주하여 온 주민들로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1937년 3월 흥업주식회사가 관여하는 주택으로 입주하여 부락은 형성되었으나 부락의 이름이 없어서 황순일, 선갑원, 송기옥 등의 선생들께서 서봉이라고 작명하였고 그 명칭을 사용한 후 만족을 느끼지 못하여 1938년 1월 황순일, 선갑원, 송기옥, 윤태언 등 유학자들이 다시 의견을 모아 보성군을 의미하는 보배 보(寶) 자와 흥업주식회사를 의미하는 흥할 흥(興) 자를 사용하여 보성군내에서 가장 흥한 부락이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보흥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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