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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조성면, 다시 보는 보성 이야기

꽃문어맨 2023. 8. 9. 23:30

조성면, 다시 보는 보성 이야기

백제시대(百濟時代)에는 동노현(冬老縣)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는 군령현(郡領縣) 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조양현(兆陽縣)이라고 하였다. 1396年(朝鮮太祖 4年)에는 고흥군(高興郡)에 속(屬)해 있었으나, 1442年(世宗 23年) 폐현(廢縣)되어 조양면(兆陽面)에 편입(編入) 되었다. 1911년 행정구역(行政區域) 폐합(廢合)에 의하여 조양면(兆陽面)과 대곡면(大谷面)을 합(合)하여 조성면(鳥城面)으로 개칭(改稱) 현재(現在)에 이르고 있다. 지금 면 소재지는 조성리(鳥城里)로 운영(運營)되고 있다.

 

보성군 조성면 우천리의 삼층석탑

시장(市場) : 조성면 조성 1리

시장리는 한때 대곡면 지역으로서 조선조 때 파청역(波靑驛)에 딸린 조성원(鳥城院)이 있으므로 원몰 또는 원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월리, 월평리, 연촌리, 금장리를 병합하여 조성리라 해서 조성면에 편입되었으며 조성면 소재지에 기서, 학교, 우체국, 시장, 역 등이 있으며 5일 시장에 연유하여 시장이라 한다.

월평(月坪) : 조성면 조성 2리

월평(月坪) 마을은 본래 대곡면 지역으로 일제강점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조성리에 병합되었으며 월평(月坪)이라 하여 한 개의 자연 부락이 되었다. 약 300년 전 영광김(靈光金)씨가 살기 좋은 곳을 찾다가 이 마을에 들어와 보니 금장산(金庄山)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산세가 좋고 농토가 비옥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마을 중앙에 큰 구덩이가 있어 이곳을 중심으로 우측 마을에는 효자(孝子)가 배출되고 좌측 마을에는 효부(孝婦)가 배출된다는 구전과 함께 구멍이라 불러오다가 약 150여 년 전부터 마을 뒷산 금장산(金庄山)이 반달모양으로 마을을 감싸고 있다 하여 월평(月坪)이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월(沙月) : 조성면 조성 3리

사월마을은 옛 조양현 관문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가매뚝, 서더래, 새터, 서당촌을 병합하여 사월(沙月)이라 하였다. 사월마을은 1580년(광해 8년) 성령대군 종의 후손 좌승지 전주 이원윤(李元閏)이 폐모 사건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귀양 갔다가 인조반정 이후 특사로 풀려 벼슬을 버리고 낙남 정읍 능주를 거쳐 1626년 축내 마을에서 거주하다 2년 후 인조 6년(1628년)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조양현 당시 마을 앞이 포구로 현 대곡천이 마을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어 서드 내라 불렀으며 이후 마을 형국이 반달 모양의 형국에서 연유 사월(沙月)이라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석부(石鳧) : 조성면 조성 4리

석부마을은 한때 대곡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중돔, 원촌, 까치등, 광대샘을 병합하여 석부 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창녕조 부정공 조대관이 득량 박실을 거쳐 한실(현 중촌) 마을에 정착하고 그의 8대손 광진이 1760년 경 이 마을에 터를 잡고 원촌이라 칭하였다 한다. 이 마을의 지명은 약 150여 년 전 조광진의 며느리 유택을 마을뒤에 정하고 묏자리를 파는데 그곳에서 오리형의 돌이 출토되어 그 후 마을명을 원촌에서 돌오리 즉 석부(石鳧)로 개칭하여 부르고 있다.

 

평촌(坪村) : 조성면 조성 5리

평촌(坪村) 마을은 한때 대곡리에 속하였으나 1980년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분구되어 조성리 5 구로 편입되면서 한 개의 자연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1910년 경에 김해인 김경환(金敬煥) 대곡에서 이주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마을의 지명은 대곡천이 굽이굽이 흐르는 물길 따라 하천의 구부러짐이 활궁(弓) 자 같다 하여 궁장터로 불려 왔으나 구장터로 와전되었으며 1980년 취락구조 개선사업 이후 분구 조성 5 구로 편입되면서 들 가운데 형성된 마을이라 평촌(坪村)이라 칭하였다.

 

매곡(梅谷) : 조성면 매현1리

매현리는 한때 보성군 대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궁현리, 연전리, 구입석리, 덕촌리 일부와 흥양군 대서면의 남당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매곡과 궁현외 이름을 따서 조성면에 편입되었다. 매곡(梅谷) 마을은 장(張), 서(徐), 황(黃) 3 성씨가 살았다고 구전되어 오나 기록은 없고 1430년(중종 12년) 송 씨가 이보향 매화(梅花) 낙지형의 명당(明堂)이라 하여 터를 잡고 중종(中宗) 35년(1540년) 천안 전(天安 全)씨, 명종(明宗) 10년 (1555년), 영광 정 씨 숙종 15년(1689년), 무인박 씨, 숙종 33년(1707년), 보성 선(宣)씨가 이보향 마을을 형성하였다 전한다. 마을뒷산(봉두산) 형세가 단봉 사지와 목화목 형국으로 생겨 왕래가 빈번하면서 매화 골짜기로 불려 오다가 한자음 표기로 매곡으로 명명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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