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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보성읍, 다시 보는 보성 이야기

꽃문어맨 2023. 8. 8. 16:00

보성읍, 다시 보는 보성 이야기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병합되어 복홀군의 중심지였다. (서기 166년경) 백제가 멸망한 후, 757년(신라경덕왕 16년)에 무주에 속하여 보성군의 중심지였다. 고려 태조 때에는 산양군에 속하였고, 성종 15년(996년)에는 패주에 속하였다가 현종 9년 (1018년)에 다시 보성군에 이속되었다. 1913년 행정구성의 폐합과 토지조사에 따라, 용문면과 옥암면 중 대야리 일부를 웅치면에 이속 시키고 양면을 폐합 보성면이라 칭하였다. 1914년 보성읍으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보성읍의 대한 다원

인사동(仁士洞) : 보성읍 보성리

인사동(仁士洞) 마을은 읍성 안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지금도 북문 거리로 불리고 있으며 입향성씨는 알 수 없으나 어진 선비가 많이 살았다 한다. 이 마을은 한때 보성군 용문면의 지역 조선초기에는 한식동(寒食洞)이라 불렀던 기록도 있다. 1941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옥암면과 병합 보성면이 되면서 일본식 지명인 원정(元町)이라 부르다 1945년 광복 후 어진선비가 많이 모여 사는 곳이라 하여 일본식 지명을 배제하고 오늘날의 인사동(仁士洞)으로 부르게 되었다. 군소재지 마을로 군청, 경찰서, 보성등기소, 전기통신공사 보성전신전화국, 보성초등학교, 보성읍교회 등이 있어 관광서의 밀집상태로 보아도 오늘날 인사동(仁士洞)이라는 마을이 어색하지 않은 곳이다.

 

동윤(東倫) : 보성읍 보성리

 

동윤마을은 시가지 동북쪽에 위치하며 향교가 있는 마을로 선조 말 동 밭(東田)이라 칭하였듯 밭(田)이 많은 곳으로 1602년(선조 35년)에 향교가 이곳으로 이전되면서 이때부터 취락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한다. 일침기에는 읍의 중심가로 발전하여 본정(本町)으로 불리어 지기재도 보성읍 중심 상가지역을 이루고 있다. 보성리와 주도했으며 현 봉리에 걸쳐 돌로 쌓은 성(보성읍성)이 있었는데 그 중간(현 전기통신공사와 보성읍교회)에 문이 있으며 그 문이 동문이었다. 마을 위치가 동문 밖에 있다고 하여 동문밖 또는 동밖이라 불러오다가 1918년 보성면이 되면서 동외라고 칭하였다. 그 후 1941년 10월 1일 보성읍으로 승격되면서 동쪽에 위치하고 향교의 명륜당(明倫當)이 있다고 해서 한때는 향교동이라 부르다 동윤동(東倫洞)으로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흥(信興) : (보성읍 보성리)

신흥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전답으로 되어 있었으나 1936년 3월 보성에 철도가 개통되면서 역 근처에서부터 상가지역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이때 역부근인 현 농협 군 지부 자리에 시장이 형성되었다가 1940년 읍사무소 뒤로 시장이 옮겨져(1950년) 원봉 3리로 이전할 때까지 상가지역으로 발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일시장은 1970년도 양재범 군수에 의해 건립 읍사무소 밑에 위치해 있다. 1937년 보성리를 분구하여 일본식 지명으로 소화정(昭和町)이라 칭하다가 1941년에 보성면이 “읍”으로 승격, 현재와 같은 동(洞)의 성격을 띠면서 읍내라 불러왔으며 1945년 광복 후 일본식 지명의 개칭에 따라 역이 있고 상가 지역이라 하여 새신(新), 일어날 흥(興). 즉 새로 일어난 곳이라 하였으나 그 뒤 신(新) 자를 믿을 신(信)으로 바꾸어 신흥동(信興洞)이 되었다.

 

태평(太平) : (보성읍 보성리)

태평마을은 읍의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오래전부터 김해 김(金)씨가 제일 먼저 터를 잡았다고 전해온다. 원래 이곳은 보성읍의 주산인 덕산이 내려오는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예로부터 범죄가 없고 부자와 관원들이 퇴임하여 살았던 곳이다. 조선시대 보성군수 방진과 그의 딸 방 씨가 화적을 물리친 내아가 있었던 곳이다. 화적을 물리치는데 화살을 나르며 혼신을 다한 그의 딸 방 씨는 이후 마을사람들이 방태평, 방덕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방 씨 때문에 화적이 물러가고 태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방태평의 이름을 따서 마을 지명도 태평골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1937년 7월 1일 이 지역이 보성읍으로 승격되면서 일본인에 의해 북쪽 길이라고 하여 일본식으로 북정(北町)이라 하였다. 해방이 되고 이후 옛 이름을 다시 살려 태평 마을이 되었다.

 

가마실 (加馬室) : 보성읍 부평 2리

가마실마을은 읍의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조양 임(兆陽 林)씨 선조인 세미공(世味公)의 후손이 동촌으로 운집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나 현재는 김(金)씨, 임(林)씨, 최(崔)씨 등이 마을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현재는 공무원이 많이 살고 있고 청학정(靑鶴亭)(1933년 5월 25일 건립) 등이 있다. 백제시대에는 몰골(沒骨)이라 불렀다 하며 그 후 마을 형세가 가마솥과 같다 하여 김곡(金谷) 골로 불러오다 일침기에는 가마실(加馬室)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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