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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겸백면, 다시 보는 보성 이야기

꽃문어맨 2023. 8. 8. 22:00

겸백면, 다시 보는 보성 이야기

조선말엽(朝鮮末葉) 1897년에 보성군(寶城郡) 14개 면개편으로 보성강(寶城江)을 중심 한 동남지역(東南地域)을 겸어면(兼於面), 서북지역(西北地域)을 백야면(白也面)이라 하여 배실(白也) 또는 우무실(井谷)의 이름을 따서 백야면 또는 정곡면(井谷面)이라 하여 입석(立石), 자포(自抱), 고전(庫田), 숙호(宿虎), 정곡(井谷), 장추(壯秋), 백곡(白谷), 덕음(德音), 가전(柯田), 오호(五湖), 평화(平化)의 11 개리 동을 관할하였는데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겸어면(兼於面)의 금곡(琴谷), 신기(新基), 대겸(大兼), 도림(道林), 안 적(安迪), 수교(水橋), 둔기(屯基), 사곡(沙谷), 가곡(加谷), 오도(五道), 침동(針洞), 능묵(能默)의 12 개리와 복내면(福內面) 사평리(沙坪里)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겸어면의 “겸”(兼) 자와 백야면의 “백”(白) 자로 2개면의 머리글자를 붙여서 겸백면(兼白面)이라 개칭하고 석호(石湖), 운림(雲林), 은덕(隱德), 평호(平湖), 도안(道安), 용산(龍山), 남양(南陽), 사곡(沙谷), 수남(水南)리의 9 개법정리(法定里)와 16개 행정운 영리(行政運營里)로 되어 있다.

보성군 겸백면

 

도림(道林) 마을의 원래 지명은 안공이었습니다.

도안리(道安里)는 본래 겸어면(兼於面)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교리(水橋里), 둔기리(屯基里), 도림리(道林里)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도림(道林)과 안 적(安迪)의 이름을 따서 도안리(道安里)라 하여 겸백면(兼白面)에 편입되었다. 도림마을은 1595년경 이곳 광대 터라는 곳에 광산김 씨(光山金氏)가 마을을 형성하고 거주하다 큰 재난으로 문덕면(文德面) 반송리(盤松里)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1651년에 큰 안공이(安迪) 마을에서 하동정(河東鄭)씨 후손이 이곳으로 분가 이주한 곳으로 작은 안공이(道林)라 불러왔고 현재는 도림 마을로 지명을 변경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오초(五草) : 겸백면 도안리

오초(五草) 마을은 1695년경에 관산임(冠山任)씨와 광산김(光山金)씨가 처음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이주해 버리고 1848년에 안 적(安迪 : 큰 안공이) 부락에서 하동정(河東鄭)씨인 정환형(鄭煥衡)이란 분이 오초(五草) 마을로 분가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지명은 오초(五草) 마을의 지형이 석호산(石虎山 425m)에서 까마귀가 날아와 알을 품으려는 형국이라 하여 오치동(烏峙洞)이라 하였는데 구전에 의하면 전란시 군대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반면에 1초대(一草隊)부터 5초대(五草隊)까지 주둔하게 되었는데 본부락 오치동(烏峙洞)에는 5초대(五草隊)까지 주둔하게 되었다. 우연히 오치(烏峙)와 발음이 비슷한 5초 대만이 큰 전과를 올렸다고 하며 그 후로 마을이름이 오초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안 적(安迪) : 겸백면 도안리

안 적(安迪) 마을은 1466년에 하동정(河洞鄭)씨 정화(鄭和)가 보성군수(寶城郡守)로 부임 시 형(兄)을 따라 입보 성했던 정세(鄭稅)의 현손 정길(鄭佶)씨가 1595년경에 본 마을에 이주하여 처음 마을이 형성되었다. 안 적(安迪) 마을의 지명은 하동정(河洞鄭)씨 정길(鄭佶)이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란을 격은 후 제일 안전한 곳을 찾던 중 본 마을의 명산인 석호산(石虎山 425m)의 지형이 와우형(臥牛形)으로 펼쳐져 가장 안전한 곳이라 하여 안공이라 하였다. 이 마을이 먼저 형성되었다고 해서 큰 안공이(安迪)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 안 적(安迪)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화천(花泉) : 겸백면 용산 1리

화천(花泉)은 조선조 단종시 1455년경에 광산김 씨(光山金氏) 김 모(金瑁)가 함양군수(咸陽郡守)로 부임한 후 영상(領相) 황보인(皇甫仁)의 사위가 되었으며 원래 김시습(金時習)과 교분이 두터워 자주 내왕 대화하고 심간(心肝)을 토론하며 당세를 기피하는 방랑의 회포를 갖더니 그때에 수양대군(首陽大君)과 권람(權覽) 한명회(韓明會) 등이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을 추살하고 영의정(領議政)겸 내외 병마도통사를 자행했다는 말을 듣고 슬피하시어 처음에 사직할 뜻을 두다가 올해 6월에 선위(禪位)의 뜻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남하하여 본 마을에 은거하게 됨으로써 처음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화천(花泉) 마을의 지명은 광산김 씨(光山金氏)인 김 모(金瑁)가 본 마을에 이주 은거하면서 이곳의 산세가 능히 몸을 숨기고 은거할 수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용산리 4개 자연 부락을 모두 능묵(能默)이라 하였으며 현재 지명인 화천(花泉)과 화촌(花村) 마을을 위와 아래에 있는 마을로 아랫마을은 마을 앞에 큰 동동 우물이 있어 화천(花泉)이라 하였고 윗마을은 화촌(花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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