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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서구, 다시 보는 달서 이야기 (4)
달서구는 서구와 남구의 일부를 분리하여 만든 자치구다. 대구광역시에서 가장 늦게 설치된 구이지만, 2017년 현재 인구가 58만여 명으로 대구광역시 최대 자치구이자, 전국 2위 규모의 자치구이다. 대한민국 경상북도 청송군과 자매 결연한 도시이다.
이곡동
이곡동은 와룡산 밑자락에 있는 마을(성서 동서‧서한아파트 북편)에 배나무가 많았다 하여 배골[梨谷] 또는 매실이라고 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이곡동으로 하였다.
▶갈산동
갈산동은 흔히 갈미라고 한다. 마을 뒷산에 칡나무가 많아 칠 뫼가 갈(葛) 뫼로, 다시 갈산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또 하나는 갈나무(떡갈나무)가 많았다는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선원마을
김해 허 씨(金海 許氏) 허재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한 이후 허 씨(許氏) 집성촌(集姓村)이 이루어졌는데, 이 마을의 이름은 이곳 출신인 상무헌 허득량(尙武奸 許得良)의 스승이었던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의 호를 따서 선원마을이라 했다.
장기동
400여 년 전, 구 씨(具氏)와 장 씨(張氏)가 마을을 개척하여 구 씨, 장 씨의 터라 하여 구장터라 불렀다고 하며, 그 후 100여 년 뒤 구 씨는 대부분 떠나고 장 씨가 마을을 이끌어 왔다고 하여 구자(具字)가 빠지고 장 씨 터라는 뜻의 장기(張基)로 불려졌다.
▶장동
임진왜란 당시 죄 없는 서민을 옥에 가두고 고문하는데, 격분한 허옥이란 사람이 큰 옥(玉) 자물쇠를 힘껏 내려치니, 통로 바닥 통나무가 갈라졌다고 한다. 이 사람이 1620년경부터 이 마을에 살게 되자 씩씩한 장정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장골[壯谷]’이라 한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진천동
옛날 진천동에는 4개의 자연촌락인 오복촌, 새 악단(새 각단), 송정동, 용천동이 있었는데, 용천동의 순우리말 표현인 ‘미리샘’을 한자로 변용하면서 ‘용 진(辰)’과 ‘샘 천(泉)’을 사용하여 ‘진천’으로 부른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대곡동
대곡동은 본래 ‘한실’이라 불리어졌는데 ‘갈밭[葛田]’과 ‘새 악단(새 각단)[新村]’으로 나누어져 내려오다가 행정동명을 정리할 때 대곡동이 되었다. ‘한실’이란 ‘큰 골’ 즉, 골이 깊고 크다는 뜻이며, 한실의 ‘한’의 뜻은 ‘크다’, ‘넓다’로 한자로 표기하면 ‘大’이고, ‘실’의 뜻은 ‘마을, 고을’이란 뜻으로 한자의 ‘谷’이다. 즉, ‘한실’은 ‘큰 마을’이라는 뜻으로 한자로 표기하면서 ‘대곡’이 되었다.
▶용천
진천동은 용천동이라고도 불려졌다. 용샘, 미리샘, 진천 등 용천마을의 다른 이름은 모두 ‘용샘’과 관련되어 있다. 지명이 유래된 ‘미리샘’, 즉 ‘용샘’은 마을의 남쪽에 있던 샘으로 옛날에 미리(용)가 나와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에서 유래하였다. 물이 많아서 큰 가뭄에도 줄지 않으며, 물이 매우 차서 땀띠에 좋다고 전한다.
용샘은 용천마을의 서쪽 가장자리에서 다소 벗어난 농지에 위치하였는데, 현재 그곳에는 선사유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지금까지도 ‘용천계’가 수백 년 이어져 오고 있으며 용천계 기금으로 정월 대보름에 동제(당산제)를 원형 그대로 지내오고 있다.
▶유천동
마을 앞으로 흐르는 내가 있어서 ‘흐르네’ 또는 ‘유천’이라 한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흐르네’, ‘미리내’, ‘용천’으로도 불리는 ‘유천’은 비슬산(毖瑟山)의 동북단을 기원(起源)으로 달비골을 상류(上流)로 하고 달비골과 수밭골이 만나는 지점을 하류(下流)로 하여 두걸도랑으로 흘러 내려간다.
총길이가 11㎞에 달하며 원래 이 내는 수원이 풍부한 대덕산과 청룡산의 줄기에서 흘러내려오기에 연중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어 유천(流川, 흐른 내)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월배에서는 가장 큰 내이고 타 지역에서도 유천이라면 다들 잘 알고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진천천으로 불리고 있다.
죽전동
죽전동에는 예전 50 가구 정도의 주민이 농사를 짓고 살았으며,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부업으로 대나무 갈퀴를 만들어 팔았다고 한다. 이들이 만든 대나무 갈퀴는 서문시장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보급되었으며, 이렇게 대나무 갈퀴를 많이 생산하는 곳이라 하여 ‘죽전(竹田)’이라 한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도시개발이 이루어지기 전 1970년 만해도 이 마을에 큰 대밭이 있었고, 그 옛날에도 마을 안 빈 집터에 대나무밭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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