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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시, 다시 보는 여수 이야기 과거 (2)
936년 후백제 멸망 이후부터 1392년까지 고려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전라남도 여수시의 역사이다. 개성 지역의 호족 세력으로 발전한 왕건(王建)은 918년 고려를 건국하였다. 935년 신라의 투항을 받아들인 후, 936년 후백제를 멸망시켜 후삼국을 완전히 통합하였다.
고려시대
940년(태조 23) 전국의 행정 구역을 주(州)·부(府)·군(郡)·현(縣)으로 개편하였다. 이에 통일신라시대에 해읍현(海邑縣, 여수)과 여산현(廬山縣, 돌산)으로 불리던 여수 지역의 이름도 각각 여수현(麗水縣)과 돌산현(突山縣)으로 바뀌었다. 이때 처음으로 여수(麗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되나 모두 승평 군(昇平郡, 순천)의 속현이었다.
고려 초기에도 여전히 지방에는 군사력을 갖고 있는 세력이 더러 남아 있었다. 성종 때에 이르러 전국이 중앙 집권 체제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이전에 서경·대도호부·진(鎭)을 제외한 일반 주·부·군·현에는 상주하는 지방관이 중앙으로부터 파견되지 않았다. 다만, 향호로 조직된 반자치기구에 일임하는 한편, 수시로 금유(今有)와 조장(租藏)이라는 조세 징수관과 징수된 조세를 중앙으로 전달하는 전운사(轉運使)와 같은 관원이 중앙에서 파견되어 순회했을 뿐이다.
지방에 상주하는 지방관은 983년(성종 2) 지방에 12목(牧)을 설치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파견되었다. 상주관인 목사(牧使)는 12목이 설치된 광주(廣州)·양주·충주·청주·공주·진주·상주·전주·나주·황주·해주 등 12개 주에 파견되어 소관 주와 현 내의 향직(鄕職)을 감독하였다. 당시 12목의 관할 구역이나 향직 단체의 수효는 알 수 없다. 전라남도 지역은 통일신라의 9주의 하나였던 무주(武州, 일명 무진주)가 사라진 대신 나주와 승주(昇州, 순천)가 12목의 일부로 되었다. 이때 여수는 승주 관할하에 있었다.
995년(성종 14) 다시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전국이 4 도호부와 10도로 나뉘고, 12 주목이 12주 절도사로 바뀌었다. 10도는 관내(關內)·중원(中原)·하남(河南)· 강남(江南)·해양(海陽)·영남(嶺南)·영동(嶺東)·산남(山南)·삭방(朔方)·패서(浿西) 등이었다. 전라남도 지역은 해양도에 해당되었으며, 여수는 12주 절도사의 하나인 승주절도사가 관할하는 여수현과 돌산현이었다.
1018년(현종 9) 또다시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전국이 4대 도호부, 8목(광주·충주·청주·진주·상주·전주·나주·황주), 56 주지군사, 28 진장(鎭將), 20 현령으로 바뀌었다. 이 개편으로 전라남도 지역의 나주가 8목의 하나가 되었으며, 이때 여수현과 돌산현은 나주의 승평 군에 속하여 대체로 고려 말까지 계속되었다. 돌산현은 한동안 폐현되기도 하였다. 고려 말 1350년(충정왕 2)에 처음으로 현령을 둠에 따라 주읍으로 승격되어 순천부와 분리되어 독립된 행정 단위가 되어 조선 초 1396년(태조 5)까지 47년간 계속되었다. 한편 고려시대에 여수 지역에는 여수현과 돌산현 외에 삼일포향, 진례부곡, 소라포부곡 등이 있었다.
왜구침임
우리나라에 왜구의 침입이 심해진 때는 13세기 고려 고종 때부터였다. 고려 말인 충정왕, 공민왕, 우왕에 이르는 사이에 더욱 극심해졌다. 왜구는 고려 전역을 침범했으나 특히 일본에 가까운 남해안 지역에 침입이 많았다. 전라남도 지역의 왜구 침입 상황 중에서 여수가 속한 순천이 7회의 침입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여수는 전라남도 지역에서 왜구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곳으로 보인다.
전라남도 지역 왜구침입 횟수정보를 제공하며 지역, 횟수 항목으로 구성된 표지역 횟수
순천 | 7 | 광주 | 6 | 장흥 | 4 | 낙안 | 3 |
영광 | 2 | 도강(강진) | 2 | 담양 | 1 | 구례 | 1 |
해남 | 1 | 탐진 | 1 | 목포 | 1 | 영산 | 1 |
나주 | 1 | 장성 | 1 | 동복 | 1 | 곡성 | 1 |
조양(보성) | 1 | 보성 | 1 | 부유(순천) | 1 | 능성 | 1 |
화순 | 1 | 고흥 | 1 | 풍안(고흥) | 1 | 옥과 | 1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순천부(여수) 지역에 침입한 왜구의 규모가 충정왕 2년(1350) 4월 100여 척, 5월 66척으로 되어 있다. 70~100척 내외의 배로 침구 했다면,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여수 지역은 남해안 방위의 요충지가 되어 많은 진포가 설치되는 군사 지역이 되었다. 특히, 공민왕 때 유탁(柳濯)이 장생포에서, 정지(鄭地)가 관음포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치는 전과를 올려 「장생포곡(長生浦曲)」이라는 전승가가 불리게 되었다. 이처럼 여수에 침입한 왜구의 규모가 크고, 그 침입이 잦았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지역에 비해 인명 살상과 재화 및 문화재의 피해가 더 많았음을 의미한다.
조선은 태종과 세종 양 대에 걸쳐 국방력의 확충과 새로운 무기 체제 정비 그리고 수군의 전력 강화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 북으로 4군 6진을 개척하고 남으로는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침입을 근절시킬 수 있었다. 여수 지역에는 1423년 내례만호진이 설치되었다가, 1479년(성종 10)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됨으로써 전라남도 동남부의 해안 방비를 총괄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속적인 평화와 국제 정세의 혼란으로 국방력이 허술해졌으며, 북으로는 여진이 강성해지고 남해안으로는 왜구들이 대규모로 쳐들어와 을묘왜변 등을 일으켜 임진왜란의 발발을 예고하였다.
특히 을묘왜변 후 전라도 일대에 왜구의 침입이 계속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인 1587년(선조 20) 2월 10일 일단의 왜구가 흥양현 일대에 침입하자 당시 녹도 만호 이대원(李大源) 장군이 이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1주일 후인 2월 17일 대규모의 왜구가 재침하였을 때에도 이대원 장군은 여수의 손죽도까지 추격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전라좌수영과의 협력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고 기상 상태가 아군에 불리하여 결국 패하고 말았다. 특히 이 전투에서 패하게 된 것은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심암(沈巖)이 먼저 있었던 전투에서 이대원 장군의 전공을 시기하여 손죽도 전투에서 아군이 수적으로 절대적인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구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왜구가 전라도 내륙지역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않아 그 피해가 소규모로 끝났으나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불과 5년 전에 발생한 손죽도 전투는 당시 조선 국방 실태의 허술함과 일본의 조선 침략 야욕을 드러낸 사건이라 볼 수 있다.
관음포대첩
▶ 경과
1383년(우왕 9) 해도원수(海道元帥) 정지(鄭地, 1347~1391)는 그의 함대를 거느리고 나주·목포 일대를 경비 중 합포(合浦: 지금의 마산) 원수인 유만수로부터 왜구가 120척의 배를 이끌고 침입해 오고 있다는 급보를 받고 나주와 목포에 주둔시키고 있던 전선 47척을 이끌고 경상도로 급히 항진(航進)하였다.
정지는 여수반도에 이르러 전열을 가다듬고 섬진강 어구에 이르고 있던 차에 왜구가 이미 노랑목의 관음포에 집결하여 있음을 알고 작전을 세우는 한편, 지리산에 병사를 파견하여 지리산신에 “나라의 존망이 이 싸움에 있으니 원컨대 저로 하여금 신에게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여 주십시오.”라는 기도문을 올리자 지금까지 내리던 비가 개었다 한다.
또 정지가 뱃머리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니 풍향이 갑자기 변동하여 정지 함대에게 유리하게 불어왔다고 한다. 곧바로 적선을 찾아 나선 정지의 함대는 박두양(朴頭洋)에 이르러 왜구의 배들과 맞닥뜨렸다. 왜구는 힘센 군사 140명씩을 배치한 큰 배 20척을 앞세우고 공격해 왔다. 정지는 앞서서 공격하는 배를 격침시킨 다음 화포를 사용하여 그 가운데 17척을 대파하였다.
▶ 결과
고려군의 함재화포의 위력에 왜구 선단의 선봉선대 17척이 분멸됨으로써 관음포해전은 장렬하게 막을 내렸다. 관음포대첩은 승리를 거둔 뒤 정지가 “내가 일찍이 왜적을 많이 격파하였으나 오늘같이 쾌한 적은 없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왜선을 철저히 격파한 해전이었다. 이때 왜선에는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군기윤(軍器尹) 방지용(方之用)이 붙들려 있다가 구출되기도 하였다. 왜구는 이 해전에서 17척의 큰 배를 잃은 외에 2,00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전의를 상실한 채 퇴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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