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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마을, 다시 보는 창원 이야기 과거 (4)
봉산마을이 속해 있는 창원시는 2008년 현재 인구 50만 명이 넘게 모여 사는 도시이다. 이 도시 속에 전형적인 농촌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봉산마을은 동읍의 자여마을 내에 포함되어 있는 자연마을이자 행정리이다. 급격한 도시의 팽창과 인구 증가를 겪은 창원시에서 시골 마을의 정취를 가득 담고 있는 봉산마을은 한 번쯤 둘러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봉산마을을 가로지르는 실개천과 골목길
봉산마을과 송정마을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나누어졌으며, 골목길 옆에는 작은 도랑이 흐르고 있다. 봉산마을 뒤 전단산 자락에서 시작되는 이 도랑과 골목길은 봉산마을과 용정마을이 만나는 지점에서 시작하여 봉산리 45번지와 43번지, 15번지를 가로지른다. 특별한 이름을 갖고 있지 못한 이 도랑과 골목길은 마을의 가장자리를 따라 흐르며 마을의 옛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 옛날 이 길이 시작되는 지점의 언덕에는 작은 간이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글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고자 건립된 곳으로, 정부에서 건립한 제도권 학교가 아니었던 이곳은 그리 오래 운영되지 못해서 마을 내에서 간이학교에 대한 기억을 지닌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 간이학교는 이름을 갖지는 못하였으나 가을운동회를 개최하여 주민들이 많이 참여하기도 하면서 학교로서 자리 잡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신방공립보통학교[현 신방초등학교]가 1923년 개교하면서 대부분의 학생이 전학하여 간이학교는 이내 폐교되었다. 이후 한동안 이 건물은 동사(洞舍)로 이용되다가 한국전쟁 이후 철거되었다. 도랑은 골목길을 따라 흘러내려 지금의 봉산마을과 송정마을의 노인정인 송산노인정 자리에 저수지를 형성하였다. 이 저수지는 봉산리 15번지와 송정리 153번지 일대에 조성된 것으로 인근 지역에 농업용수를 제공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작은 연못이었다. 저수지 끝자락에는 물레방앗간이 있었다. 물레방앗간은 1920년대 중반까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하는 방식이 바뀌다
농사일은 한 해를 모두 투자해서 임하는 것이다. 단시간에 파종에서 수확의 결실을 맺을 수 없으며, 오랜 시간의 기다림을 견뎌야만 수확물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농사일이다. 이러한 농사일을 하다 보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여러 사람의 일손을 한꺼번에 필요로 하는 작업도 있다. 여러 사람의 손이 필요한 공동 작업을 할 때는 우리네 조상님들은 두레와 품앗이를 주로 하였다. 봉산마을에서는 공동 작업할 일은 주로 품앗이와 품팔이로 해결한다. 품앗이와 품팔이는 일을 하는 방식에서는 차이가 없다. 단지, 일을 하고 난 뒤 품을 어떻게 돌려받을지가 다를 뿐이다. 먼저 품앗이는 품을 팔면 다시 품으로 돌려받으며, 품팔이는 품을 팔면 그 대가를 돈 혹은 현물로 대신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품앗이는 자신의 농지가 있을 때 참여가 가능하며, 품팔이는 자신의 농지가 없어도 참여할 수 있다. 품앗이는 농촌에서 비교적 단순하게 협동하여 노동을 하는 형식을 일컫는다. 봉산마을에서는 남자들의 품앗이와 여자들의 품앗이를 구별하였다. 먼저 여자들이 하는 품앗이 작업은 주로 모심기를 할 때 이루어졌다. 모를 심는 것은 어린 모를 논에 다시 심는 작업이기 때문에 몸이 가볍고 빠른 사람이 유리하여 여자들이 주로 작업하였다. 그리고 남자들은 모심기를 할 때 줄을 잡아주는 작업이나 논매기를 할 때 품앗이를 많이 하였다. 논매기는 논에 난 잡초를 제거하는 작업으로 보통 벼가 다 자라기까지 세 벌 논매기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논두렁을 정비하는 작업을 할 때도 품앗이를 한다. 그러나 봉산마을 역시 모내기 기계인 이앙기와 농토 위를 오가면서 곡식을 탈곡하고 선별하는 작업을 하는 콤바인이 도입되면서 점차 품앗이가 사라지게 되었다. 마을에서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노동 형태 중 또 다른 하나는 품팔이이다. 품팔이는 일한 하루하루를 계산하여 현물로 그 대가를 지불하기 때문에 마을에서는 한 해 농사가 시작할 때가 되면 그 해 일당을 미리 정한다. 일당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에 따라 다르다. “옛날 마을에 구 씨 성을 가진 감찰노인이 있었는데, 이 노인이 정초 품삯을 정하곤 했어. 그러다 이 노인이 죽고 난 다음에는 마을 이장하고 어르신 몇 분이 정초 회의를 거쳐 품삯을 정했지.”(김문학, 남, 84세) 품삯의 적고 많음은 그 일에 참여하는 사람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남보다 품삯을 적게 받은 주민이 생기면 마을에서는 어김없이 싸움이 일어났다. 이 싸움을 사전에 막기 위해 마을에서는 항상 정초에 품삯을 정했던 것이다. 광복이 막 이루어진 직후에는 하루 일당으로 쌀 한 되씩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30~40년 전에는 쌀 서너 되를 일당으로 지급하였으며, 형편이 어려운 해에는 쌀 한 되와 보리 한 되를 일당으로 주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새마을운동이 시작될 즈음에는 곡식이 아닌 돈으로 일당을 지급하였다. 여성의 일당은 남성에 비해서 3분의 1 가량 적었으며, 간혹 아이들이 품팔이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어른 품삯의 절반을 받았다. 오늘날에는 품앗이는 대부분 사라졌으나 품팔이는 아직도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이루어지는 품팔이는 논농사에서가 아니라, 과수나무 접붙이기나 과일 수확하기, 고추심기와 따기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더욱이 봉산마을에서는 농사일을 대규모로 하는 가구가 생기면서 품팔이가 더욱 성행하고 있다.
노래로 고된 노동을 달래다
봉산마을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단감 재배가 시작되기 20~30년 전까지만 해도 봉산마을에서는 벼농사가 주류를 이루었다. 벼농사는 예부터 육체적인 노동을 요하였으며, 공동 작업이 많이 수반되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고된 노동 속에서 흥겨움을 찾고자 하였으며, 노동에 지친 몸을 위로하고자 노래를 불렀다. 봉산마을에서 현재 전해지고 있는 민요 중 노동요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 「모찌기 노래」 모찌기는 모내기를 위하여 모판에서 모를 뽑아내는 작업을 일컫는다. 「모찌기 노래」는 이 과정에서 불리는 노동요로서 어린 모가 빨리 자라 벼가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부르는 노래이다. (앞소리) 모야~ 모야~ 아. 노란 모야/ 운제(언제) 커서 열매 열래(김소순, 여, 90세, 일명 신방댁) (뒷소리) 이달~ 크고 훗달~ 크고/ 칠팔 월에 열매 열래(사성순, 여, 84세, 일명 남산댁).
▶ 「모심기 노래」 1 -모찌기가 끝난 이후 본 논에 모를 옮겨 심는 작업을 모심기라고 한다. 모심기 작업은 여러 사람이 구령에 맞추어 행동을 일괄적으로 하기 때문에 「모심기 노래」 1의 가사는 단순하게 이루어져 있다. (앞소리) 둘러싸자. 둘러나 싸자/ 이 못자리로 둘러싸자 (뒷소리) 에워싸자. 에워나 싸자/ 이 못자리로 에워싸자(지동댁, 여, 76세).
▶ 「모심기 노래」 2(「쟁기노래」) 합동으로 이루어지는 일에서 행동을 맞추기 위해 단순한 가사로 부르는 노래가 있는 반면 힘든 노동을 그대로 표현하는 노동요도 있다. 「모심기 노래」 2는 힘든 노동을 가사 속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성아 이 논배미를/ 반달같이 도 뭐 하네/ 네가 무슨 반달이냐/ 초승달이 반달이지/ 세월이라 왕대밭에/ 금비둘기가 알을 낳아/ 그 알을 하나 주웠으면/ 금년 과거를 매 할 거를(지동댁, 여, 76세).
▶ 「모심기 마치는 노래」 「모심기 마치는 노래」는 힘든 모심기 혹은 모내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르는 노래이다. 노랫말 속에는 젊은 시절 힘든 노동으로 지친 몸을 위로하고자 하는 바람이 잘 드러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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