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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산마을, 다시 보는 창원 이야기 과거 (3)

석산마을 중앙에는 일제강점기 개설된 신작로가 남북으로 가로질러 놓여 있다. 석산마을 앞에는 최근 새로운 지방도가 건립되었다. 마을 입구에는 소원사라는 작은 사찰이 위치하고 있으며, 소원사 옆에는 주남민물이 있고, 그 옆에 석산마을의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표지석과 마주 보는 도로 건너편에는 석산버스정류장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마을로 10m가량 들어가면 농산물판매장과 마을 농기계창고가 있다. 이 공동창고에 서서 마을을 바라보면 중앙에 도봉서원이, 그리고 그 옆으로 종가와 동산정 등 한옥들의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동산정 옆에는 최근 새로 건립한 석산마을회관이 위치하고 있다.

석산마을 일출/ 일몰 명소

유가의 덕을 중히 여기는 삶

석산마을에는 예부터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는데, 그 가운데 물 와(勿窩) 김상욱(金相頊) 선생도 있다. 김상욱 선생의 자는 인숙(仁叔)으로, 석산마을 상산김 씨 입향조로서 1892년 병조판서에 추증된 김명윤 선생의 10 세손이다. 물 와 선생은 1857년(철종 8년)에 출생하여 1936년 향년 80세로 운명하였다. 

 

처사(處士)로 이름을 날렸던 물 와 선생은 ‘정승 세 명이 대제학 한 명만 못하고, 대제학 세 명이 처사 한 명만 못하다’는 말을 웅변해 주는 삶을 살았다. 이는 정승보다는 대제학이, 대제학보다는 처사가 지방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인재를 길러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데서 비롯된 말이라고. 물 와 선생은 어려서 과거에 나갈 뜻을 접고 서산 김흥락 선생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서산 선생은 금계(金溪)에서 학문을 강론하였는데, 남쪽 사람들이 앞 다투어 가서 배웠다고 한다. 특히 서산 선생은 물 와 선생에게 ‘격언팔절(格言八節)’을 써서 주어 권면하였고, 이에 물 와 선생은 이를 학자들 사이에 전수하여 후대의 학자들이 물 와 선생을 ‘유림(儒林)의 종장(宗匠: 경학에 밝고 글을 잘 짓는 사람)’이로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물 와 선생은 『성리유찬(性理類纂)』, 『순충록(殉忠錄)』, 『예의고증(禮疑考證)』, 『강의(講義)』 등 14 책(冊)을 저술하고, 8권 4 책의 『물 와 문집(勿窩文集)』을 남겼다. 『물 와 문집』은 제1권에 시(詩), 제2~4권에는 서(書), 제5권에 서(書)·잡저(雜著), 제6권에는 잡저(雜著), 제7권에 서(序)·기(記)·발(跋)·잠(箴)·명(銘)·상량문(上梁文)·축문(祝文)·제문(祭文), 제8권에 비(碑)·묘지명(墓誌銘)·묘갈명(墓碣銘)·묘표(墓表)·행장(行狀)·유사(遺事)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산비탈에서 천석을 이룬 지풍 헌

석산마을의 지중린은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김봉세와 김봉상 보다 나이가 많은 연장자이거나 마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은 사람으로 추정된다.

 

지중린의 이름은 『충주지 씨상원수공파보』에서도 확인되는데, 충주지 씨 32 세손으로 자(字)는 윤오(閏五)이며, 부인은 김해김 씨이다. 충주지 씨의 족보를 살펴보면, 1400년대 초기 충주지 씨 26 세손인 시몽동이 석산마을로 들어와 32 세손인 지중린을 거쳐 33 세손인 지달원까지 거주하였고, 1850년대 후기 34 세손인 지경칠 대에서 인근 창원시 북면 동전리로 이거한 것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충주지 씨는 석산마을에서 26 세손~33 세손까지 총 8대, 약 240년간 거주한 것이다. 현재 석산마을 인근에 거주하고 있는 충주지 씨 37 세손 지봉재 씨와 지청수 씨에 의하면 윗대 어른들은 굉장한 부자였으며, 증조부 대에 동면 석산리에서 북면 동전리로 이거 했다고 한다. 석산마을에 선조들이 거주할 당시, 충주지 씨는 다른 마을 사람이 (석산) 마을 앞을 지날 때 함부로 말을 타고 지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두 사람은 어릴 적 매년 시월이면 묘사를 지내기 위해 석산리를 찾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동읍 일대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조선시대 풍수지리와 관련하여 유명했던 성지[일명 성지도사] 스님이 동읍 일대에 산재한 모든 마을들을 둘러보고 생업과 세거지의 좋고 나쁨을 매겼는데, 첫째는 산남이요, 둘째는 석산이며, 셋째는 다호로서, 특히 그중 둘째인 석산은 학자와 선비가 많이 배출될 지형이라 했다고 전한다. 그만큼 석산마을에 풍수적으로도 뛰어난 명당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천석꾼 지풍 헌은 이러한 점을 생각하여 지금의 석산마을회관에서 백월산 쪽으로 올라가는 안쪽[현 윗마을]에 터를 잡은 것으로 생각된다. 윗마을의 북쪽에는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 안쪽에서 바깥쪽의 석산마을회관으로 내려오는 시멘트 포장된 길이 원래 개울이 흘렀던 곳이라고 한다. 현재와 같이 포장되기 전에 이 길은 리어카가 다니기도 힘들 정도로 좁은 길이었다고. 이를 토대로 살펴보면 지풍 헌이 터를 잡은 윗마을은 인근 지역의 명산인 백월산을 주산으로 하고, 마을의 좌향을 동으로 잡아 좌청룡 우백호가 좌우로 서 있는 마을 안쪽 높은 곳이 된다.

 

그리고 남북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고, 마을 옆을 흐르는 개울물을 식수로 사용하며, 마을 아래 경작지에 물을 관개하여 생업 활동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차례로 석산마을에 들어오게 되는 전의이 씨와 상산김 씨는 석산의 윗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고 마을입구 쪽 아랫마을에 자리 잡게 된다.

 

현재 마을 주변 안돌미골과 비정골에는 지풍 헌 및 지 씨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이 묏자리는 인근 지역에서 가장 좋은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다.

 

이는 지 씨 문중 사람들이 그만큼 이른 시기에 묘를 썼기 때문에 좋은 터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또한 이를 통해서도 석산마을에 가장 먼저 들어온 성씨가 지 씨였음을 추정케 한다. 그리고 1827년 효자 류광익을 천거하는 장문의 기록으로 보아 19세기 초까지 충주지 씨의 세력이 석산마을을 비롯한 동읍 일대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주남저수지에 잠긴 옛길의 추억

석산마을에 거주하는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이 작은 저수지의 사이사이로 난 길을 따라 석산마을에서 인근 대산면과 김해시 진영읍은 물론이고, 인근의 신방초등학교도 다녔다고 한다. 

 

더불어 50~60년 전까지 주남저수지 인근에 소를 풀어 키웠다고 한다. 마을 주민 김기수 씨는 어릴 적 이곳에 소를 풀어 키우다가 잃어버려 찾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주남저수지 인근 동읍과 대산면 일대에서 소를 풀어 키우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석산마을 사람들은 주남저수지 주변에는 소를 놓아 키우고, 저수지에서는 민물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김상균 씨의 경우, 주로 통발과 가래로 잉어를 잡았다. 김상균 씨는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아버지가 16㎏ 정도 되는 큰 잉어를 가래로 눌러 잡아서는, 이것을 지게에 지고 현재의 창원시 봉림동에 살고 계시는 외할머니께 가져다 드렸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김보원 씨에 따르면, 약 2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주남저수지에서 30분 정도만 그물질을 하면 민물새우와 민물조개 등을 사과상자 하나 채울 만큼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불과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주남저수지에서는 다양한 민물 어류가 살았으며, 이를 인근 주민들이 포획하여 생활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1964년 「어업진흥법」이 마련되면서 고기잡이가 허가제로 바뀌었고, 1967년에는 석산마을 김태희 씨가 어촌계를 조직하여 내수면 어업을 조직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현재는 동읍의 내수면어촌계장 김산 씨와 김일·김용희 씨 등 석산마을 사람 세 명이 어촌계원으로 주남저수지에서 민물양어장과 고기잡이를 하고 있다. 

 

김용희 씨에 따르면, 과거에는 주남저수지에서 민물장어가 많이 잡혔으나, 1983년부터 시작된 낙동강 하구의 제방공사가 이루어진 후부터는 잡히지 않는단다. 이와 같이 주남저수지는 작은 저수지들로 이루어졌던 과거에는 석산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근처 마을 사람들이 그 사이로 난 길을 교통로로 이용하며 주변 목초지에서 소를 키우고 여가 시간에는 민물고기잡이를 하였으나 1922년 일제에 의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확장·정비되고, 1980년대 낙동강 하구 제방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되는 변화를 겪었다. 

 

그 후로도 주남저수지는 어촌계의 생업 공간으로 여전히 제 몫을 담당하고 있으며, 인근 논과 밭에 농업용수를 공급해 주고는 있으나 주위 목초지에서 방목하던 소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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